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세 전투 (문단 편집) === 위군의 고전과 후퇴 === 5월에 들어 위군은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심각한 보급 문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조상은 위에 복속되어 있던 [[강족]]과 [[저족]]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하도록 명했는데, 한중의 지리적 험난함은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험악하여 희생자가 속출했다. [[자치통감]]과 조상전을 인용하자면, "군량 수송 중에 소, 말, 노새가 죽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울부짖는 백성이 길을 가득 메웠다."[* [[제갈량]], [[조엄#s-1]] 같은 쟁쟁한 인재들마저 한중 수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유일하게 한중 수송에 대해 긍정적인 말이 적혀 있는 것은 [[두기#s-1]]뿐으로, 5천 명을 보냈으나 한 명도 탈주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조상의 진영에서는 퇴각 문제를 두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참모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양위(조위)|양위]]는 조상에게 형세를 설명하고, 빨리 퇴각하지 않으면 패할 것이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등양과 이승은 이를 반대하여 양위와 다투었고, 분노한 양위는 등양과 이승은 장차 나랏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니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한편 [[곽회]]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퇴각했다. 덕분에 곽회가 이끄는 군대는 크게 패하지 않았으며, 때문에 곽회는 부절(권위를 상징하는 증표)까지 수여받았다. 결국 보다 못한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마의는 과거 조조도 장로 정벌과 [[한중 공방전]] 때문에 두 번 한중을 공략했지만 엄청난 손실을 겪었고 현재는 촉한군이 흥세라는 험악한 지형을 먼저 점거했으므로 진격은 커녕 후퇴에도 엄청난 손실을 겪을 것이니 빨리 후퇴하라고 재촉했다. 사마의의 편지를 받은 하후현은 이를 조상에게 알렸지만, 위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비의]]의 대규모 지원군이 한중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조상은 퇴각을 지시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위군은 굶주리고 지쳤으며, 비의는 촉군만이 아는 샛길을 이용해 낙곡의 심령, 아령, 분수령을 점거하여 길목을 모조리 차단해 위군을 고립시켰다. 조상은 필사적으로 싸워 퇴각로를 뚫고 도망갔지만 위군은 실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수송대는 대부분 죽거나 실종되어 이민족들이 위를 원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